율곡 이이선생 생애 (生涯)

  이이(李珥)(字)는 숙헌(叔獻)이요, 율곡(栗谷)은 호(號)이요, 시호(諡號)는 문성공(文成公), 아명(兒名)
은 현룡(見龍),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고려조에 중랑장(中郞將)인 돈수(敦守)의 12대손 이원수(李元秀)와
어머니인 유명한 여류천재인 신사임당(申師任堂) 사이에 셋째 아들로 1539년(중종31년 丙申) 12월26일
인시(寅時 : 오전4시)에 외가인 강릉 오죽헌(烏竹軒)에서 탄생하여1584년(선조17년 甲申)정월 16일 새벽에
서울 대사동(大寺洞) 우거에서 졸(卒)하다. 당시 향년 89세였다.

※ 산실은 어머니 신사임당 태몽시 흑룡(黑龍)을 보았다 하여 그 산실을 몽룡실(夢龍室)이라 이름지어서
지금도 오죽헌에 남아있다.

1538년 (중종33년)

  3 세

 외할머니 이씨가 석류를 가지고 무엇과 같으냐고 물으니, 「석류라는 것은 부서진 붉은 구슬을 껍질이 싸고 있는 것」이라고 대답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함.

1541년 (중종 36년)

  6 세

 강릉에서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돌아옴(서울집은 수신방(壽進坊). 지금의 청진동.).

1543년 (중종 38년)

  8 세

 파주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에 올라 시를 지음.

1546년 (명종 1년)

 11 세

 아버지가 병환이 나자 팔을 찔러 피를 드리고 사당에 가서 쾌유를 기도함.

1548년 (명종 3년)

 13 세

 진사 초시에 오르고 학문의 명성이 날로 자자해짐.

1551년 (명종 6년)

 16 세

 5월에 어머니 신사임당 별세.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장례하고 3년동안 시묘살이 함. (어머니 行狀<先비行狀>을 지음.)

1554년 (명종 9년)

 19 세

 우계 성혼(牛溪 成渾)과 도의의 교분을 맺음. 3월에 금강산으로 들어가 불교공부를 함.

1555년 (명종 10년)

 20 세

 금강산에서 나와 강릉 외가에 감. 여기에서 자경문(自警文)을 지음.

1556년 (명종 11년)

 21 세

 봄에 서울로 돌아옴. 이해에 한성시(漢城試)에서 수석으로 합격함.

1557년 (명종 12년)

 22 세

 9월에 성주목사 노경인(盧慶麟)의 딸 盧氏와 혼인함.

1558년 (명종 13년)

 23 세

 봄에 경북 예안의 도산으로 퇴계 이황선생을 찾아 뵘. 겨울에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으로 장원함.

1561년 (명종 16년)

 26 세

 5월에 아버지 이원수공이 별세. 어머니 무덤에 합장함.

1564년 (명종 19년)

 29 세

 봄에 聽松 成守침의 별세로 곡하고, 제문과 행장을 지음. 7월 생원 진사에 오름. 8월 明經及第에 올라 戶曹佐郞에 임명됨. (전후 9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거리의 어린이 까지 「9도장원공」이라 부름). 어명으로 어제(御題)율시를 지어 바치매 왕이 크게 우등함.

1569년 (선조 2년)

 34 세

 6월 校理에 제수되어 7월에 서울로 올라옴. 9월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올림. 동료들과 論時務九事를 상소함. 10월, 휴가를 얻어 강릉으로 돌아감. 외조모상을 당함.

1571년 (선조 4년)

 36 세

 정월, 해주로부터 파주 율곡으로 돌아옴. 이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여름에 교리(校理에) 임명, 소환되어 의정부검상사인(議政府檢詳舍人), 홍문관(弘文館) 부응교지제교(副應敎知製校)兼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 춘추관(春秋館), 편수관(編修官)으로 옮겼으나 모두 병으로 사퇴하고 해주로 돌아감. 6월, 청주목사에 제수됨.

1572년 (선조 5년)

 37 세

 3월, 병으로 체임되어 서울에 올라옴. 여름에 부응교(副應敎)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 栗谷으로 돌아감. 우계 성혼(牛溪 成渾)과 리기,4단7정, 인심도심(理氣, 四端七情, 人心道心)을 론함. 9월, 사간원 사간(司諫院 司諫)에 임명 되었으나 취임 않음. 12월 홍문관 응교(弘文館, 應敎)에 임명, 사퇴하고, 弘文館 전한(典翰)도 사퇴함.

1573년 (선조 6년)

 38 세

 7월, 弘文館 直提學에 임명되어 사퇴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여 부득이 올라와 세 번 상소 허락을 받고, 8월에 栗谷으로 돌아감. 9월에 다시 직제학에 임명. 사퇴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함. 겨울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 지제교(知製敎) 兼 경연참체관(經筵參替官), 춘추관(春秋館) 수찬관(修撰官)에 오름.

1574년 (선조 7년)

 39 세

 정월,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임명되고, 재해로 인하여 구언(求言)하는 국왕(선조)의 교지에 응하여 (만언봉사<萬言封事> : 11680자)를 올림. 3월,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됨. 4월 다시 승지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음. 6월 서자 경임 출생. 10월, 황해도 관찰사로 제수되어 청혁일도지폐(請革一道之弊)를 상소함.

1575년 (선조 8년)

 40 세

 3월, 병으로 체임. 율곡으로 돌아감. 9월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올림. 10월, 조정으로 돌아와 사정전(思政殿)에서 소대(召對)함.

1577년 (선조 10년)

 42 세

정월, 석담(石潭)으로 돌아가 종족을 모두어 동거계사(同居戒辭)를 지어 읽힘. 12월,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완성함. 鄕約, 會集法 및 社倉을 창립함.

1578년 (선조 11년)

 43 세

 고산석담구곡(高山石潭九曲)의 다섯째 골짜기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짓고 정사 북쪽에 주자의 사당을 세움. 3월, 대사간에 임명되어 올라와 사은하고 4월에 율곡으로 돌아감. 5월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상소로 사퇴. 만언소(萬言疏)를 올림.

1579년 (선조 12년)

 44 세

 3월 庶子 景昇 출생함. 소학집주(小學集註)를 완성함. 5월,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상소로 사퇴함.

1580년 (선조 13년)

 45 세

 5월, 기자실기(箕子實記) 편찬. 12월, 대사간으로 조정에 들어옴.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선생의 묘지(墓誌)를 지음.

1581년 (선조 14년)

 46 세

 3월, 병으로 세 번 사직을 청하고 또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음. 4월, 구민지책(救民之策)을 위한 회의를 열 것을 주청. 6월,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으로 특진. 재차 사직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다시 예문관 제학도 사직코자 하였으나 불허. 8월에 체직됨.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됨. 대사간에 임명 되었으나 사퇴. 불허함에 병으로 사면됨. 10월, 자헌대부 호조판서로 승진됨. 11월, 경연일기(經筵日記) 완성됨.

1582년 (선조 15년)

 47 세

 정월, 이조판서에 임명됨. 7월, 어명으로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지어 올림. 금시습전(金時習傳)을 지어 올림. 학교모범급사목(學校模範及事目)을 지음. 8월, 형조판서에 임명됨. 9월, 의정부우참찬에 임명되고 숭정대부로 특진. 의정부 우찬성에 임명되어 사퇴하였으나 불허되자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시폐(時弊)를 극간함. 12월, 다시 병조판서를 임명하매 사퇴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함.

1583년 (선조 16년)

 48 세

 2월, 시무육조(時務六條)를 계진함. 윤2월,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함. 3월, 십만양병을 주청함. 6월, 삼사(三司)의 탄핵으로 사퇴를 청하고 율곡으로 돌아감. 9월 판돈영부사(判敦寧府事)에 제수됨.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사퇴를 상소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함. 10월, 서울에 오라와 다시 사토를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함.

1584년 (선조 17년)

 49 세

 정월 16일, 서울 대사동에서 별세. 3월20일, 파주 자운산(坡州 紫雲山)에 안장함.

1624년 (인조 2년)

沒後41년

 문성(文成)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림.

1681년 (숙종 7년)

沒後98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