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송시열선생의 생애
                                                                                
1607(선조 40)~1689(숙종 15)-83세졸

1607년 (선조 40년)

1세

  충청북도 옥천군 구용리에서 음11월12일탄생. 어릴 때의 이름은 성뢰(聖賚)라고 하였으며, 본명은 시열(時烈)이고, 字는 영보(英甫),號는 우암(尤庵)또는 화양동주(華陽洞主)라고도 하였다. 본관은 恩津,시조는 판원군. 大原의 14세손이고, 쌍청처사(雙淸處士) 유(愉)의 9세손이며,出天의 孝 서부(西阜)공 구수(龜壽)의 증손이고, 문충공인수(文忠公麟壽)규암의 종증손으로 명가의 후손이다.
西宮(유폐되어 있는 왕대비의 궁)에 홀로 사은숙배(謝恩肅拜-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임금이나 대비에게 감사한 인사를 드리는 예법)하던 충절의 부군 수옹공 甲祚와 모부인 선산곽씨의 3자로서 모부인이  밝은 달과 같은 큰구슬을 삼키는 태몽을 꾸었고, 부군은 종가에서 제삿날 공자가 여러 제자를 데리고 집에 들어온 꿈을 꾸고서 우암의 출생을 맞이 하였다고 한다.

1618녕 (광해군 1년)

12세

  세 살 때에 이미스스로 글자를 깨우쳤으며, 천품이 비범하여 12세에 이미<격몽요결>을 수료하였다.

1625년 (인조 3년)

19세

  한산李씨 덕사공의 녀와 결혼 하였다.

1628년 (인조 6년)

22세

  공자, 주자, 율곡의 성현학을 엄격히 가르쳐 주시던 부친이 55세로 별세하여 친상을 당하니, 지극한 효성을 다하여 산소 앞에 막을 짓고 3년간 시묘(侍墓)생활을 하였다.

1630년 (인조 8년)

24세

  부친 3년상을 탈상하고, 아버지 생존시 교훈에 의하여 공, 주자학에 계승자 이율곡의 수제자로 당시 제일가는 대학자이었던 김사계(金沙溪-金長生) 선생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성현학을 전공하였다. 수학 1년후 사계선생이 별세하여, 그의 2자인 신독재(愼獨齋-金集)에게 이어서 수학을 하였다.

1633년 (인조 11년)

27세

  생원시(生員試-지금의 보통문관시험)에서 태극음향의 이치와 천지조화에 근원을 통쾌하게 논설하여 시험관장이었던 영의정 최명길(崔鳴吉)은, 이 선비는 장차 명경석학대현(名卿碩學大賢)이 될 큰 인물이라고 극찬하여 장원급제 시켰다. 이해 10월 처음으로 경능참봉(敬陵參奉)에 임하였으나 곳 그만두었다.

1635년 (인조 13년)

29세

  나라에서 그의 탁월한 재질과 인물됨을 인정받아 왕세자 봉림대군(鳳林大君-후에 효종대왕)의 스승으로 임하게 되니, 선생은 온갖 정성을 다하여 의리와 인도(人道)에 맞는 성현학을 힘써 가르쳤다.

1636년 (인조 14년)

30세

  병자호란이 일어나 굴욕의 항복을 당함에 봉림대군과 그의 형 소현세자 2왕자가 청나라에 벌모로 잡혀가게 되니, 나라의 수모와 비통함을 한탄하고,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1637년 고향인 황간냉천에 돌아가 어머니를 뫼시고 은거, 줄곳 청나라 오랑케에 당한 굴욕과 수치를 보복하여야겠다는 굳은 결의하에서 학문에 더욱 집념 하였다. 그리고 두 왕자가 무사히 돌아올 것을 기원하였다.

1650년 (효종 1년)

44세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청나라 인질에서 풀려나온 봉림대군이 효종대왕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자, 바로 옛날 스승인 선생을 소명하여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또는 집의(執義)에 임하게 하여 항상 임금과 가까이 있어 나라의 경사(經史)를 강론하고 오랫동안(8년간) 벌모로 있던 임금에 굴욕을 뼈저리게 수모하여 그의 복수심으로 불태웠다. 그리하여 효종대왕과 같이 북벌계획의 큰뜻을 세웠다. 그러나 그 당시 국력이 유악하여 청국을 북벌하기에는 우선 나라에 기강을 바로잡고, 국력을 배양토록 하는 정책이 필요하였다. 이에 선생은 면밀한 계획으로 13개 조항의 정책을 수립하여, 임금에게 상소한 바 효종대왕은 쾌히 이를 받아드려 국력배양쇄신의 근원으로 삼았다. 이와 같이 북벌계획의 대업을 수행코자 함에 높은 벼슬자리에 있던 김자점(金自鮎) 일파들은 이 대업의 계획을 못마땅히 여겨 이 사실을 청나라에 밀고하는 반역행위가 일어났다. 이에 효종대왕은 대단히 진노하여 감자점 일당을 즉시 몰아내고, 문관에는 선생(송우암)과 송준길(宋浚吉)을 등용하고, 무관에는 이완대장(李浣大將)을 발탁하여 숙원인 북벌계획을 착착 진행하였다. 그러나 몰려나간 반역 김자점 일파들은 집요하게 청나라에 계속 밀정하여 청나라로 하여금 사신을 보내와 문책과 협박을 당하게 되어 북벌계획에 일대 차질을 초래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선생은 비분강개하고 다시 시골로 돌아갔다. (지금의 대전 소제동)그러나 선생의 북벌계획과 효종대왕에 대한 충성심은 잠시도 잊어본 일이 없어 수시로 북벌계획의 계책과 상소를 은밀하게 함을 잊지 않았다.

1655년 (효종 6년)

49세

  북벌계획에 추호도 변함이 없는 효종은 또다시 선생을 소명하여 예조참판을 거쳐 이조판서(1658년)의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게 하여 그 계략을 숙의 수립하였다. 이같이 국사가 막중한 때에 모친 곽씨부인 상을 당하여 집상(執喪)의 예를 하게되니, 그야말로 공사간에 다난하였다.

1659년 (효종 10년)

53세

  효종은 이해 3월11일 유달리 이조판서 선생만을 불러서 북벌에 독대설화(獨對說話 : 단둘이 회담하는 것. 궁궐안에서는 이런 일을 안하는 것이 원칙임)도 하였고, 또 밀찰(密札)을 세자로 하여금 전달케 하였다. 이 어이된 일인고 독대설화 한지 50여일을 지나서 5월4일 졸현히 효종이 41세로 승하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듯, 선생의 비통함은 이를데 없었다. 따라서 그 웅대하고도 역사상 미증유의 북벌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때에 효종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비 : 조대비의 존호)의 복제문제 1년복으로 선생의 정론을 피력 하였던 바, 이레 반대한 남인 윤전(尹鐫)의 3년복설이 나와 쟁론이 극심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직론은 결코 굴하지 않아 당시 영의정 정태화도 선생이 제기한 1년복에 따랐으며, 새로 등위한 현종왕도 이에 승복하여 분부 시행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선생을 다시 숭록대부에 특진 이조판서겸 의금부사까지 겸임 시키고 다시 좌참찬으로 임명하여 효종의 능지까지 짓도록 하였다. 이렇듯 복제문제가 선생의 주론대로 낙착되니 이제는 장지문제를 가지고 다시 윤선도, 허적등이 일어났다. 이같은 쟁론과 국사에 어지러움을 심히 슬프게 여겨 모든 벼슬을 다 버리고, 심신을 자위코자 금강산을 유람하기도 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1666년 (현종 7년)

60세

  또다시 선생의 복제문제에 불만을 품은 경상도 유생들이 상복고증(喪服考證)이라는 16조를 상소하여 선생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현종은 이를 일축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리혀 이들에게 과거를 볼 자격까지 박탈하였다. 선생은 항상 효종의 애태우던 북벌계획의 좌절감을 잠시도 잊지 않고 또 복제문제, 장지문제 등이 말썽을 이루어짐을 통탄하고, 이해 8월에 속리산 화양동에다 정사를 짓고, 주자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선생은 본시 선현의 교훈을 심봉하여, 정칩보다 학문에 더욱 집념하였다.

1668년 (현종 9년)

62세

  현종은 또다시 2월 우의정의 벼슬을 내리고 소명하였으나, 8월에 사양하였다. 그러나, 간곡한 임금의 소명에 가끔 상경하여 왕의 자문에 응하고, 또 중대사에 있어서는 상소 하여, 국사를 바로 잡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1672년 (현종 13년)

66세

  5월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안가서 또한 사퇴하였다.

1674년 (현종 15년)

68세

  효종왕비 인선왕후가 돌아가시자 이미 1년복으로 마친 자의 대비가 예절에 따라 둘째며느리에 대한 대공복(大功服 : 9개월)이 타당하다는 예조에서 발의가 되자, 현종은 이에 대노하여 발의한 중신들을 엄벌에 처하였다. 선생은 자기의 제자가 이처럼 벌을 당한 것은 예론의 근거가 자기에게 있음을 알고, 시골에서 조용히 벌이 내리기를 기다렸다.

1677년 (숙종 3년)

71세

  배위 한산이씨(配位 韓山李氏) 72세로 졸하다. 새로 등위한 숙종은 선생에게 현종의 묘비분을 지어 올리라는 명을 받자, 신은 이미 선왕께 죄를 짓고 있는터에 어떻게 비문을 지을 수 있겠느냐고 사양하였다. 이때 경상도의 선비 곽세건이가 선생의 치죄(致罪)를 상소함을 계기로 거세되었던 남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호응하자, 서인측이 이에 대결하게 되자 숙종은 이에 남인들에 편승하여 이해 12월에 성생을 유배(流配)키로 하였다. 이때부터 선생은 덕원, 웅천, 장○ , 청풍, 거제 등지에서 귀양살이의 불우한 몸이 되었다.

1679년 (숙종 5년)

73세

  남인들이 집권한지 5년만에 영의정 허적의 아들 허견과 복선군의 반란모의사건으로 인하여, 허적, 윤휴 등 일파가 사형에 처하게 되니, 선생은 유배지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1683년 (숙종 9년)

77세

  나라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는 명예직 봉조하(奉朝賀)라는 벼슬을 받았고, 숙종왕은 선생을 높혀서 대노(大老)라고 부르고, 자기를 소자(小子)라고 까지 하였다.  ※ 大老 : 대현군자로 크게 높혀서 존칭하는 칭호.

1689년 (숙종 15년)

83세

  숙종의 후궁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남인들과 상의 결정)함을 반대한 상소를 올리자 숙종은 이에 대노하여 이제까지의 벼슬을 또다시 전부 박탈하고, 이해 2월 제주도에 귀양을 가게 되었다. 5월 그의 죄를 묻기 위하여 소환하여 6월초, 정읍에 도차하자, 남인들의 간계로 사약이 내리어 드디어 6월8일수명 하였다.
선생은 이미 사약수명할 것을 알고, 6월 3일 장성에 도달하자, 寧陵(효종의 묘)을 향하여 글을 지어 4배하고 선조에게는 비음기, 현판의 개서, 자손들에게는 계자손시(戒子孫詩), 계자손서(戒子孫書)를 文谷 김수향의 자손들에게는 묘지명을 증초로 지어 주었다. 이 묘지명은 선생이 남긴 금석지문 총 597편 중 가장 뛰어난 1편이라고 한다.

1694년 (숙종 10년)

몰후5년

  박탈당한 벼슬이 복원되고, 문정공(文正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695년)

1717년 (숙종 43년)

몰후28년

  예문관에서 왕명으로 선생의 문집을 간행케 되었다.

1735년 (영조 11년)

몰후46년

  여주 寧陵에 가까이 선생의 祠宇(사우)를 창건하였으나, 조정의 의론이 엇갈리어 곧 회철되었다.

1756년 (영조 32년)

몰후67년

  영의정의 추서를 받았고, 효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또한 분묘에 배향받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子"짜를 받아서 "宋子"라고 존칭하게 되었다.

1779년 (정조 3년)

몰후90년)

  선생의 묘소 입구에 묘비명을 정조의 어제어필로 세웠다. 여주에 사우를 짓기로 어명으로 윤허하다.

1780년 (정조 4년)

몰후91년

  祠宇의 묘정(廟庭)에 비를 세우다.(어제어필)

1785년 (정조 9년)

몰후96년

  祠宇를 완공하고, 그 이름을 "大老祠"로 명명하였다.

1787년 (정조 11년)

몰후98년

  우암문집을 "宋子大全(송자대전)"이라고 왕명으로 명명받아 우리나라 문집중에서는 처음이며, 하나 뿐으로 "大全(대전)"이라고 불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