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 열전(淸白吏 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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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나 지금이나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순화(醇和) 안정하게 되는 것은 첫째로, 그때 그시대의 국기(國基)가 확호(確乎)하여야 하고, 사회생활의 안녕질서와 족신풍토(足信風土)가 충만하여 져야 함에 있다.
이같은 국태민안(國泰民安)의 원동력은 그 어느 때를 막론하고, 위로는 국정을 다스리는 관료(官僚)로부터 아래로는 지방행정을 보살피는 이속(吏屬)들, 즉 지금의 공무원들의 정신적 자세와 실천행동생활상에 달려 있는 것이다.
내가 맡고 있는 국정과 서정백반(庶政百般)에 과연 참된 목민관(牧民官)으로서 알뜰한 양민관(養民官)으로서 지극히 보살펴 주는 호민관(護民官)으로서 그 정신적 자세가 확실히 정립되어 있는가에 있는 것이다.
국록(國祿)을 받고서 일하는 「나」 라는 존재위치는 엄연한 公人 즉, 공복(公僕)일지언정 사사로운 개인 내가 아닌 것이다. 이에는 반드시 공복으로서 기강이 있고, 공명정대하게 그 직무를 수행하여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게 마련이다. 국가체제와 제도는 시대에 따라 변천은 있을지언정 그 의무와 기강에 수반되는 사명감은 고금이 다를 바가 없다.
관청민자안(官淸民自安)이라 官은 곧 청렴결백(淸廉潔白)하여야 하며, 만일 官吏 즉 公僕이 부정이 있다면 이는 사회부조리와 직결되는 것이며, 사회주의 구현에 일대 차질을 갖어오게 되는 것이다.
官이라 함은 백성을 다스리고(修己以后治人), 內政을 성실히 한 뒤에 외구(外寇)를 막을 수 있는 (修內治外), 스스로의 修己가 선행되어야 함이다. 그렇지 않으면 기강이 문란하여 지고, 내정이 난맥(亂脈) 산만하여 국력의 손실을 초래하여 급기야는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즈음 엄단추진하고 있는 사회부조리 정화와 아울러 부정공무원의 숙정작업은 현재난국에 처해 있는 우리나라의 국가적 안보차원에서나 국가총화단결뿐 아니라, 일대 국민 정신 혁명으로서 국가의 만년대계를 위하여 지극히 당연한 새로운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하는 바이다.
이에 우리는 크게 각성하여 이후의 숙정을 일대계기로 새로운 이도쇄신(吏道刷新)의 정신혁명을 진작하여 우리 선조들의 청백리정신을 귀감으로 삼고자 典古大方에 수록된 청백리열전을 간추려 編著하는 바이다.

<본 청백리 명단은 典故大方과 朝鮮王朝實錄에 간추린 것임.>

          이름을 천추에 빛낸 사람들 (가나다 순)

劍 君(검 군)

具致寬(구치관)

奇 虔 (기 건)

吉 再 (길재)

金尙憲 (김상헌)

金若恒 (김약항)

金延壽 (김연수)

金長生 (김장생)

金 詮 (김 전)

金 淨 (김 정)

金宗直 (김종직)

金 集 (김 집)

盧克淸(노극청)

孟思誠(맹사성)

朴 祥 (박 상)

朴守良(박수량)

朴彭年 (박팽년)

成 俔 (성 현)

宋太用 (송태용)

宋 欽 (송 흠)

申公濟 (신공제)

沈守慶 (심수경)

柳 寬(유 관)

柳成龍 (유성룡)

尹錫輔 (윤석보)

尹思翼 (윤사익)

李時白 (이시백)

李安訥 (이안눌)

李約東(이약동)

李彦迪(이언적)

李 原 (이 원)

李元翼 (이원익)

李浚慶(이준경)

李直彦 (이직언)

李恒福 (이항복)

李賢輔 (이현보)

李 滉 (이 황)

李 塤 (이 훈)

鄭文炯 (정문형)

鄭誠謹(정성근)

鄭 陟(정 척)

趙彦秀 (조언수)

趙元紀(조원기)

曺致虞 (조치우) 

周世鵬(주세붕)

崔 碩 (최 석)

崔有慶 (최유경)

咸有一(함유일)

許 琮(허 종)

許 琛 (허 침)

許 항 (허 항)

玄德秀(현덕수)

黃孝源 (황효원)

黃 喜 (황 희)

 

 

 

 

 

劍 君 (검 군)     新羅 眞平王(579-631)때 花郞이다.

신라의 화랑으로 의를 위해서 목숨도 아끼지 않는 滅私奉公(멸사봉공)으로 一貫(일관) 하였다.

흉년이 들어 穀食難(곡식난)이 심해 지자 다른 사람들이 도둑질한 쌀을 그에게 주었는데, 천금도 싫다며
거절하였다.

이같은 義의 존중 사상은 삼국통일의 원동력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화랑정신이 된 것이다.

그는 義를 위한 淸白精神(청백정신)으로 자기를 희생 함으로써 화랑정신을 더욱 건전하게 발전 시킬 수
있는 정신적인 터전을 이루어 주는 계기를 마련한 사람이다.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德望人格(덕망인격)으로서 의리에 살았던 五戒(오계)의 정신을 실천으로
행한 것이며, 이같은 정신과 힘이 삼국통일의 底力(저력)으로 발전한 것이다.


咸有一(함유일)   (1106-1185)  

고려 中期 관리이다. 자는 亨天, 內侍 尙書左丞 工部尙書를 역임하였다.
임금도 알아준 廉勤吏(염근리)였다. 평생토록 해어진 삼배 옷으로 지냈으므로 弊衣記事(폐의기사)라는 별명까지 붙였다.
그러면서도 「正直, 節儉(절검)으로 天命을 기다릴 따름인데 어찌 가난함을 슬프게 생각 하리오.」라며,
떳떳하게 살았다.
함유일 은 記事라는 계급의 관리로 재직하면서도 항시 헤어진 옷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폐의기사라 고 불렀다.
그는 80세를 살았던 고려 中期의 관리로서 대단히 淸廉하였으며, 또 부지른 하게 일한 사람 이였다.
그에 관한 고려사의 기록에는 그가 모든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시종일관해서 節操(절조)를 지킨 사람으로 되어 있다.
특히 그는 廉勤하여 그의 업적을 칭찬하는 소리가 자자하였다는 것이고, 정직한 데도 남달리 유별났거니와 절약하고 검소한데서 더욱 다른 사람의 모범을 보인 淸白吏였다.

盧克淸(노극청)과 玄德秀(현덕수)  

노극청은 고려 명종때 청렴한 선비이다. 노극청이 백금 9근을 주고 산 집이 현덕수 에게 12근에 팔리자 3근을 되돌려 주는 등 물질 보다 정신력으로 살았다. 현덕수는 고려 명종때 장군 內侍祗候安北都領과 安南都護副使, 兵部郞中, 司宰小尹, 殿中監, 兵部尙書, 역임했다.
고려 명장 현덕수는 의기가 높아 큰소리를 잘 쳐 때로는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물욕없던 노극청은 散員同正의 벼슬에 있으면서도 집을 팔 정도로 청렴하게 살았다. 두 사람은 다같이 고려시대에 살면서 물질보다 정신력으로 살았다. 의리는 물론 청렴을 삶의 보람으로 삼았고, 고집불통이라 할만큼 의리와 청렴을 정신적인 지주로 삼고 산 良吏요, 청백리였다.

崔 碩 (최 석) 

 고려 충열왕 때 良吏이다. 昇平府使 秘書郞을 역임했다. 昇平(지금 順天, 昇州의 古名)부사의 임기를 끝내고 비서랑으로 승진되어 還京할 때 전례에 의하여 주민들이 贊還太守에게 주는 말 여덟 마리를 다시 돌려 보냄으로서 府民이 그 덕을 칭송하여 비를 세우고 그 비를 八馬碑라 하였다. 이는 지방관의 善政碑, 立碑의 시초가 된다. 고려시대의 良吏이며, 청백리이다.

金若恒 (김약항) 

조선 태조 때 文官이다. 字는 久卿, 號는 척若齊이다. 恭愍王 23년에 문과 급제하여 典校主簿, 강원도廉問默使, 執儀, 判典校寺事를 거처 光山君冊封, 의정부贊成事에 追贈되었다.
김약항은 태종 때 청백리에 선정된 인물로서 절개 강한 인품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참변을 당했다.
그의 절개는 태조가 개국할 때 약항의 친구들이 의거모의에 가담하자고 했으나 신하의 절개를 주장하며 불응한 일도 있다. 또 명에 보내는 외교문서 내용이 좋지 않다 하여 항의할 때 명에 가서 해명하며 끝까지 굽히지 않았음으로 명제가 오히려 그를 가상히 여기어 그 문제는 해결되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이태조는 그를 광산군에 봉했고, 태종은 의정부 찬성사를 추증 하였다.

吉 再 (길재) (1353~1419)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이다. 字는 再父, 號는 治隱, 金烏山人이며, 諡號는 忠節公이다.
禑王 12년에 진사에 합격 청주목사록 을 주었으나 받지 않고, 성균관 박사를 역임하고, 문하주서를 내렸으나 안받고 태종이 태상박사를 내렸으나 불사이군 이라 하여 거절했다.
여말선초에 걸친 학자로서 충효사상을 일깨운 절의가 강한 성리학자이다. 조선왕조가 수립되자 불사이군을 내세우고 벼슬을 사양하였다. 길재는 성리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이색, 정몽주,권근 에게서 학문을 닦았으며, 불교를 이단시하여 율교 윤리를 강조하였다. 그러기에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함께 三隱으로 불려지고 있다.

黃 喜 (황 희) (1363~1452) 

    ▼   유물

        

산북면 대하리 장수황씨 종택 오른쪽 숙청사에 보관되어 있는 방촌 황희정승의 유물로 옥서진.산호영.서각대와 분재 문서로 전기 4가지 물건은 황희선생께서 평소에 애용하시던 물건들이다.

조선초기의 名相이다. 初名은 壽老, 字는 懼夫, 號는 방村, 諡號는 翼成공이다. 문과 급제, 육조판서역임 대사헌, 유명사 참찬, 좌우의정, 평안도 순문사, 한성판사,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정과 의가 아니면 행하지 않은 선행으로 한평생을 보냈다.」

바른말하다가 오해받아 파직도 여러 번 당했다. 강원도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 관찰사로 임명되어 선정을 베풀고 영의정까지 올랐다. 대신일지라도 국고지출은 억제하여야 한다고 하며, 공사구별을 엄격히 한 청백리로 공무원의 귀감이었으며, 민중의 사표가 되었으며, 세종 조에 배향되었다.

孟思誠 (맹사성) (1359~1431) 

 조선 세종때의 相臣이다. 號는 古佛, 諡號는 文貞公, 文科 及第, 대사헌,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했다.
세종때 좌의정까지 지냈으며 일평생을 청렴결백으로 생활화되어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청빈 속에서 더욱 꿋꿋하였고, 바르지 못한 일에 대해서는 국왕의 말이라도 무턱대고 따른 것이 아니라, 바른 말로 아뢰어 후세의 표본으로 삼은 것이다. 세종이 왕위에 있을 때 부왕의 태종실록이 편찬된 것을 모두 보기를 원하자 맹사성은

「실록이란 것은 모두 당시의 모든 일을 사실대로 기록하였다가 후세에 보이기 위하여 이룩한 것인데 이제 전하께서 만일 이를 보고 고치시면 후세의 임금님이 이것을 본받아 행할 것이요, 그러면 관리들이 두려워서 제대로 기록하지 못할 것이니 이점 굽어 살피옵소서」

하고 간곡히 만류하자 세종은 이 뜻을 그대로 받아들여 태종실록이 고침없이 그대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뒷날 실록이 문제되거나 국왕이 함부로 가감할 뜻을 보이면 언제나 맹사성의 건의와 세종대왕의 한 일이 전()가 되어 법 이상으로 국왕에 대한 구속력을 나타낸 祖宗之法이 되었던 것이다.

柳 寬 (유 관) (1346~1433) 

조선초기의 名臣이다. 初名은 觀이며, 字는 夢思, 敬夫이고, 諡號는 文貞公이다. 문과급제, 봉산군수,사헌중승거쳐 조선시대에 原從功臣, 대사성, 강원, 전라도 관찰사, 형조판서 대사헌, 우의정을 역임했다.
麗末鮮初에 걸쳐 네 임금을 섬겨 우의정까지 지냈다. 그렇지만 비 새는 단간 초가집에서 베옷, 짚신으로 소탈한 일평생을 지냈다. 그의 청렴에 감동한 태종은 몰래 집 울타리를 선물하고, 그의 죽음에 세종은 흰옷 입고 별세를 애도하였다.이는 곳 평상시에 청렴결백하면서도 국사를 올바르게 하였고, 국가라는 대전제하에서 생활하였기 때문이다.

朴彭年 (박팽년)  (1417 태종17 ~ 1456 세조2 ) 

      

박 팽 년 사우

 

 

지정종별 : 도지정 기념물 제27호

위      치 : 충주시 신니면 신청리 94 번지

조선시대의 사육신의 한사람으로 박팽년을 모시는 사당으로 선생의 자는 인수 호는 취금헌이며 본관은 순천이다.
숙종때에 복원되어 충정이란 시호를 받고 세워 졌으며, 건물이 노후화 되어 1968년 충주시에서 복원 단청되었다

조선초기 학자이며, 충신, 字는 仁수, 號는 醉琴軒, 諡號는 충정공이다. 본관은 순천이며, 閑碩堂 仲休의 아들이다. 세종 16년 문과에 급제하여, 集賢殿 학사가 되어 편집사업에 참가하였으며,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대부로서의 도를 잃지 않은 굳은 절개의 사육신의 한 분으로 충절의 표본이다. 뛰어난 재능으로 집현전의 학사로 한글창제 등에 참가하였으며, 의리와 윤리의식과 꿋꿋한 성품의 인물이다.

奇 虔 (기 건) 

조선시대 세종 때의 명신이다. 호는 靑坡(後改 眩菴)이고,시호는 貞武公, 관찰사, 대사헌, 判中樞府事를 역임했다. 세종 때 布衣(벼슬 없는 선비)로서 拔擢되어 일약 지평이 된 후 관찰사, 대사헌을 지냈다. 단종 때 벼슬을 그만 두었는데 세조가 그를 등용하고자 다섯 번이나 그를 찾아갔으나 청 맹(눈뜬 장님)이라는 핑계로 세조에게 불임하여 충신은 不事二君이라는 충절을 지키었고, 재직시에는 청렴한 문관이었다.
그는 성품이 淸簡하고 세밀 유능하였으며, 충 의로운 그의 인품으로 청백리에 錄選 되었고, 그가 죽은 후 정무공이란 시호를 내리어 그의 충절을 기리었다.

具致寬 (구치관) (1406 태종 6 ~ 1470 성종 1) 

조선초기의 재상이다. 자는 而栗, 호는 충열공, 推忠佐翼功臣, 이조참판, 호조판서, 우의정, 영의정을 역임했다. 綾城府院君에 책봉 되고, 사후에 佐理功一等을 내렸다.
문과에 올랐으나 늦은 벼슬길이지만 청렴결백으로 일관하였다. 하급관리 생활만 10여년으로 주위에선 억울하다는 동정과 협조도 받았다. 이조판서 때 인재만 골라 등용 시켰으며, 청탁하면 되려 피해만 받았다.
우의정, 영의정까지 지낸 선비의 氣槪한 몸에 지닌 청백리였다.

成 俔 (성 현)  (1439 세종21 ~ 1504 연산10)

조선초기의 명신 학자. 자는 磬叔(경숙), 호는 용齊( 제) 또는 浮休子(부휴자) 또는 虛白堂이며, 시호는 文戴(문대)이다. 1462년에 문과 1466년에 拔英試(발영시)에 급제하고 박사로 등용된 뒤 예문관, 수찬 등을 지냈다.
1488년에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명나라 사신을 맞아 글을 주고 받았는데 사신들은 그의 뛰어난 시에 크게 감탄했다 한다. 1493년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그 뒤 예조판서에 올랐다. 그 해에 성현은 유자광 등과 악보를 정리한 <악학궤범>을 편찬했고, 관상감 등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뒤 공조판서와 대제학을 겸하였다.
예조판서 때 행동10戒를 지어 생활신조로 삼았으며 세상을 떠날 때도 상례와 장례를 모두 간략히 하라고 유언으로 남겼다. 벼슬이 조금만 높으면 호화로운 묘소와 조경으로 이목을 끌게 하는 생활태도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행동 지침이며, 그의 인생 철학을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는 열 가지의 지켜야 할 계명을 지었으니, 즉「하늘을 공경하고(敬天), 홀로 있을 때 정성스럽게 행동하고(愼獨), 마음을 바르게 가지며(正心), 욕심을 적게 가지며(寡慾), 과오를 뉘우치며 고치고 (行簡), 사람 얼굴을 썼으면 사람의 짓을 하여라 하고(踐形), 예에 돌아와야 한다.(復禮)」는 것 등이다.
어느 것이나 인생을 살아 가는데 있어서 양심과 행동의 준칙으로 삼을 만한 내용들이다.

鄭 陟 (정 척)  (1390 공양왕 2~1475 성종6) 

조선 세조 때의 대신이다. 자는 明之, 호는 整菴, 陽齊이며, 시호는 恭載公이다.
태종 14년 문과 급제 후 知中樞府事(지중추부사) 후에 正憲大夫에 오르고, 判漢城府事, 大提學 등을 역임했다.
정척은 성품이 정성스러운 사람으로 효도가 지극 하였다. 일찍이 세종이 왕위에 오른 뒤 정척을 불러보고 이르기를 「부왕께서 일찍이 淸直이라는 두 글자를 卿에게 下賜하시던 그 말씀이 오히려 나의 귀에 선하게 남아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미 태종 때부터 그의 청백정신은 잘 알려졌던 것 같다. 세종 때는 너무나도 유명한 청백리가 많이 배출되었으며, 그같은 청백리가 임금을 잘 보필하였기에 우리 역사에서 빛나는 한 시대가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한글의 창제를 비롯한 과학기구의 발명과 더불어 외치면에서도 김종서의 六鎭開拓 등 우리 민족의 개척정신과 창조정신이 가장 발현된 때였다.

李約東 (이약동)  (1416 태종 16~1493 성종 24) 

조선 성종때 문관이다. 자는 春甫, 호는 老村, 시호는 平靖公이다.
문종元年 문과 급제, 千秋使, 知中樞府事 등을 역임했다. 치부하는 것을 수치로 알고 지냈고, 經史에 밝았으며, 청주목사, 이직시 사냥채찍까지 놓고 떠난 곧은 성품이다. 평생에 청백하고 조심하여 자손들을 훈계할 때에는 반드시「금을 돌처럼 여기라.」고 가르쳤다.이는 재물을 탐내지 말라는 것으로서 마음가짐을 바로 하려면 금전등 재물을 멀리 하는 것이 가장 옳은 것임을 가르쳐 준 것이다. 이처럼 이약동은 청백리 정신으로 한평생을 살았고, 그 결과 청백리로 기록된 것이다.

金宗直 (김종직)  (1431 세종13~1492 성종23) 

조선 성종 때의 성리학자.호는 점필재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459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형조 판서, 지중추부사에 올랐다.몸가짐이 단정하였으며, 고려 말의 유학자 길재의 학통을이어받아서 수백 명의 제자를 길러 내어, 이른바 영남 학파를 이룩하였다. 성종의 신임을 받아 그의 제자들을 벼슬자리에많이 앉힘으로써 전부터 있던 세력인 훈구파와 대립이 심하였다.결국 이 대립은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었고, 그의 시신은목이 잘리는 형을 받았다. 죄가 풀린 뒤 숙종 때 영의정벼슬이 내렸다.관직보다는 학문과 문장으로 특출한 그는 청백리에 뽑히기도 한 것이다.저서로 유명한 <조의제문> 외에 <청구풍아>
<유두유록> < 점필재집> 등이 있다.

許 琮 (허 종)  (1434 세종16~1494 성종25) 

조선 성종때 대신,호는 상우당(尙友堂)이고,시호는 충정(忠貞)이다. 1457년 문과에 급제, 의영고 직장·통례문봉례랑 등을 거쳐 선전관을 지냈다. 1465년에 함길도 절도사가 되어 1467년에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난을 가라앉혀1등 공신이 되었다. 1477년에 예조 판서가 되었다가 건주 위의 여진족이 침공하자 평안도 도순찰사가 되어 이를 격퇴하고 우참찬에 이어 좌참찬에 올랐다. 그는 문무를 갖춘 신하로이름이 높았으며, 여러 차례 북쪽 국경지역에 파견되어 여진족의 침입을 막았다. 1488년에는 서거정· 노사신 등과
< 향약집성방>을 한글로 옮겨 적었다. 성종 때 청백리에 뽑혔다.

許 琛 (허 침)  (1444 세종26~1505 연산군11) 

연산군 때의 대신 호는 이軒 시호는 문정공 이다. 성종 때 문과 급제 후 호당에서 독서하고, 교리, 弼善, 직제학, 전라, 경상, 양도관찰사, 대사헌, 이조판서, 좌의정을 역임했다.
그는 형인 허종과 함께 명상으로 이름을 떨쳤다. 어려서부터 총기가 맑아서 학문을 배울 때 한번 읽으면 절대로 잊어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욕심이 없고, 부드러운 성미였으므로 그의 집은 항상 가난했고 詩文은 담담하면서도 깊이가 있고, 비범했으나 자랑 하지는 않았다. 집안에 한 사람의 청백리가 나오기도 어렵거늘 형제간의 청백리가 나온 것은 그 집안의 생활관 과 인생관을 엿볼 수가 있는데 형제는 다같이 국가에 크게 이바지하였던 것이다.

尹錫輔 (윤석보)  ( ? ~1505 연산군 11) 

 연산군 때 문관 자는 子任이다, 문과 급제 후 직제학, 중종 때 도승지가 추증 되었다.
그의 성품은 청렴하여 양심적이었으며, 물욕에 탐하지 않고, 생활고에 겹쳐 배곺음과 추위로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자기가 받은 봉급으로 최소한의 생활을 영위해 나간 보기 드문 청백리였다.

鄭誠謹 (정성근)  ( ?  ~1504 연산군1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이신·겸부이며 시호는 충절이다. 대제학 척의 아들이며 김종직의 제자이기도 하다. 1474년에 식년 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하였고 전적·지평 등을 거쳐, 1481년에는 부교리로서 승지의 업무를 담당할 자로 추천되기도 하였으며, 경기도 경차관으로서 경기도로 파견되어 교동현의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돌보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482년에는 홍문관 부응교가 되었고, 전라도에 파견되어 기근 때에 빈민을 구하고 나쁜 일이 없는지 조사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1483년에는 황해도 경차관이 되었고, 홍문관 전한을 거쳐1487년 시강관으로 쓰시마섬〔對馬島〕의 선위사가 되어 일본에 파견되었다. 이 때 대마도주가 그에게 화선과 호초(식물 이름으로 후추) 등을 선물하였으나 받지 않자, 후에도주가 특별히 선물을 다시 보내왔으나 역시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어 이듬해에는 해주 목사가 되었고, 1490년에는반우형·표연말 등과 더불어 사유(스승)로 뽑히기도 하였다.그 후 경기도 경차관·우부 승지를 역임하고 1493년에는좌부 승지에 올랐는데, 해주 목사 때의 부정 사건에 대하여 탄핵을 받게 되자 재임 도중에 사직하였다. 1494년에 성종이 죽자 수묘관으로 3년 동안 지내기도 하였다. 1495년에는한가한 벼슬인 행호군이 되었으나 다시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가, 1497년에 다시 기용되어 승지·직제학을 역임하였다.
1504년에 연산군이 폐출되어 사약을 받고 죽은 어머니 윤씨의 복위를 반대한 사람들과 폐위 사건에 관련된 신하들을 학살한 갑자사화가 발생하였는데, 그도 이에 관계되어 군기시 앞에서 목베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1506년에 중종 반정으로 인하여 중종이 왕에 오르자, 그의 억울함을 풀어 그의 아들을 관직에 채용하고 그에 대해서는 이조 판서에 추증하였다. 또한,1507년에는 충신·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하여 세우는붉은 문인 정문이 향리에 세워졌으며, 의정부· 육조·경조의2품 이상의 당상관과 사헌부· 사간원의 우두머리가 추천하여뽑는 결백한 관리인 청백리에도 녹선되었다. 경기도 광주(廣州)의 구암 서원에 제향되었다.

趙元紀 (조원기)  (1457 세조 3~1533 중종 28) 

 조선 중종때 상신이다. 자는 理之, 시호는 文節公이다. 경원부사, 大司諫(대사간), 판의금부사, 이조참판, 전라감사, 형조판서를 역임했다.
「忠孝節儉」을 생활신조로 삼고 청백하게 살았다. 초가의 사택부엌엔 소금과 나물뿐이면서도 떳떳하게 살아갔다. 곧은 선비정신은 연산군이 사초를 보려 하자 거절하고 파직까지 당하기도 하였다.
조원기는 충, 효, 절, 검,을 생활정신으로 삼고 재상을 지내면서도, 대단히 검소했고, 청백한 절개가 있어서 비록 지위가 재상에 있으면서도 그가 사는 집은 쓰러지는 듯 초라한 것이었다. 낮은 담이 겨우 비바람을 가릴 정도였고, 부엌에 있는 것이라고는 소금과 나물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의롭고 부당한 일에 굽히지 않고 결백하게 살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한 그는 성인께서도 벼슬과 록을 사양하기 어려움을 비유하여 「그것은 마치 칼날을 밟는 어려운 일과 같다」고하였음을 일깨우면서 공직 자로서의 어려움과 행동이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가를 말했다. 이러한 데서도 그의 청백리 정신과 자세를 짐작케 한다. 이러한 그의 충실성으로 문절공 이라는 시호까지 받게 된 것이다.

朴 祥 (박 상)  (1474 성종 5 ~ 1530 중종 25) 

조선전기 문장가이다. 자는 昌世 호는 訥齊(눌제), 시호는 문절공이다.
연산군 9년 문과 급제하여 교서관,정자, 사간원, 한산군수, 단양, 순천, 상주, 나주목사, 그리고 의빈도사를 역임했다.
박상은 천성이 구애됨이 없고, 기개와 절조가 있었으며, 소탈하고 강직하였다. 웅대한 시문을 구사한 조선초기의 문장가였다. 이퇴계는 그의 高風卓識을 가리켜 「하늘이 내린 完人」이라고 칭찬하였다. 成俔, 신광한, 黃廷或,과 더불어 서거정 이후의 4가로 칭송되고 있다.

金 淨 (김 정)  (1486 성종 17 ~ 1520 중종 15)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 호는 충암(忠庵)이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507년( 중종 2년)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정언 순창 군수 등을 지냈으며, 폐비 신씨를 복위 시키고자 상소하였다가 충북 보은으로 유배당하였다. 1516년에 다시 등용되어 부제학 대사헌 형조 판서 등을 지냈다. 조광조와 함께 미신 타파와 향약 시행 등에 힘썼으나, 1519년 기묘사화 때 감옥에 갇혔다가 제주도로 옮겨진 뒤 사약을 받고 죽었다.
천재,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폐정개혁에 앞장서며, 언제나 민중들 편에 들고 고통을 들어주는데 앞장 섰다. 유배지 에서도 그곳에 풍속을 개량하는 등 최선을 다해 계몽하였다. 그는 오로지 선정과 청백정신으로 민중을 잘 보살펴 주고, 선도한 양리였던 것이다. 시와 그림에 뛰어났으며, 저서에 <충암집> <제주풍토록>등이 있다.

宋 欽 (송 흠)  (1459 세조 5 ~ 1547 명종 2) 

조선 중종때 명신이다. 자는 欽之, 호는 知止堂, 시호는 孝憲公이며, 判中樞府事 겸 知經筵事(지경연사)를 역임하였다. 항시 청렴한 생활 따라서 별명도 三馬太守로 불렀으며, 모범적인 언행은 물론 맡은 임무에 성실을 다했던 청백리였다. 그러하였기 때문에 여러번 一品階資(일품계자)에 올랐다. 삼마태수라고 불릴만큼 그는 청렴하고 사치나 호화로움을 모르고 한 평생을 살았다. 오로지 민중을 기르는 선정을 베풀어 국익증진에 기여했음으로 효헌공이라는 시호까지 내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李賢輔 (이현보)  (1467 세조 13 ~ 1555 명종 10) 

조선 중종 때의 문신. 호는 농암(聾巖)이고, 시호는 효절(孝節)이다. 1498년에 문과에 급제, 사관, 정언이 되어 서연관의 잘못을 논박하다가 귀양살이를 하였다. 중종 반정 후에 복직되어 충주 부사, 안동 목사 등을 지내면서 인재 배양에 힘쓰다가, 부제학, 형조 참판에 이르러 관직에서 물러나 자연을 벗하여 많은
시가를 남겼다.
그가 부제학으로 있을 때였다. 그가 부모님을 뵈려고 오는데 그때 부친의 나이는 94세였고 , 숙부는 92세, 장인은 82세였으므로, 그는 그 고을 사람 중에 70세 이상인 아홉 명을 모아 구노회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자기 자신이 어린이처럼 어리광을 부리며 효도를 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그는 과연 청백정신과 효도로서 일관한 일생이었다.작품에 10장으로 전하던 < 어부가>를 5장으로 고쳐 지은 < 어부사>가 있고, 그 밖에 < 춘면곡> <효빈가>< 농암가> 등이 있다. 저서로는 <농암집>을 남겼다

朴守良 (박수량)  (1491 성종 22 ~ 1554 명종) 

 조선 명종 때의 명신 자는 君遂(군수), 본관은 泰仁 이다. 어려서 고향에서 金漑(김개)에게 배우고, 중종9년 과거 급제하여, 호조판서,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며, 38년간 봉직하며, 효성이 지극 하였다.
언제나 신중하고 치밀한 인품으로 38년간의 긴벼슬 생활로 국가에 직하였지만 청백정신은 뛰어나 초가삼간뿐이었다. 형조판서등 화려한 관직생활이나 동료의 부정도 관용치 않고 엄벌한 성품이다. 효심도 지극 하였으며, 유언으로 큰 비를 세우지 말라 하였고, 명종도 그의 청백정신에 감탄하여 비문에 쓸 말이 없으니 백비를 세우라 한 것으로 보아도 오직 한 사람뿐인 그의 정신을 알수 있다. 임금께서 백비를 내린 것은 박수량이 처음이고 마지막으로 여겨지는 바, 보기 드문 청백리로서 화려했던 관직생활에 너무나도 청렴결백하게 살았던 것을 알수 있다. 박수량은 동지춘추관사로 중종 실록과 인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으며, 학자로서 존경받을 뿐만 아니라, 청백리로서 이름 높은 주세붕과 이황과도 교유 하면서 정론을 나누기도 하였다. 청백당은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었으나, 고향에는 명종께서 하사한 유품들이 그대로 전해오고 있다.

李彦迪 (이언적)  (1419 성종 22 ~ 1553 명종 8) 

조선 중종 때의 현신, 자는 復古, 호는 晦齊(회제), 시호는 文元公이다.
1514년 과거에 급제하여 현감, 직제학, 전주부윤, 희선에 올라 예조참판, 웊찬성, 의정부 좌찬성을 역임하였다. 27세에 「五箴(오잠)」을 짓고 전주부윤 때 數千言의 상소를 올렸으며 「一綱十目(일강십목)」등 국가대본과 정치강령을 논하여 왕의 칭찬을 받기도 하였으며, 사후에 영의정이 추증 되었으며, 文廟(문묘)에 배향되었다.
이언적이 전주부윤으로 있을 때 임금의 求言에 의하여 일강십목의 상소를 올렸든바 그 내용인즉, 綱이 하나라는 것은 임금의 마음을 뜻하는 것이요, 十目이라 함은

1, 집안일을 잘하여야 한다.   2, 나라의 근본을 길러야 한다.   3, 朝廷을 바로 잡아야 한다.
4, 사람의 채용과 파면에 관계되는 것을 신중히 하여야 한다.   5, 천도를 순리로 따라야 한다.
6, 인심을 바로 잡아야 한다.   7, 언론의 길을 넓혀야 한다.     8, ()()와 욕망을 경계하여야 한다.
9, 군정을 잘 다스려야 한다.   10, 機微를 잘 살펴야 한다.

이같이 그는 사람됨이 실천적으로 충효에 뛰어 났으며, 학문이 精深하였다. 나이 27세가 되던 元旦에 오잠을 지었으니 즉,

첫째 하늘을 두려워 하는 것.   둘째 마음을 기르는 것,  셋째 몸을 공경하는 것  넷째 과오를 고치는 것.
다섯째 뜻을 돈독히 하는 것.

등이었다. 이미 청년기에 세운 이같은 마음가짐과 행동 지침으로 언제나 자기 행동을 반성하고 개선해 나갔던 것이다. 이언적은 청렴하게 살아가면서 선비로서,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 노력한 것이다. 조선왕조시대 오현의 한분으로 국가대본과 정치기강을 바로 세울 것을 논하여, 임금의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주세붕 (주세붕)  (1495 연산군 1 ~ 1554 명종 9)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호는 신재(愼齋), 남고(南皐), 무릉도인(武陵道人)이며,시호는 문민(文敏)이다. 1522년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부수찬 등을 지냈다. 1544년에 우리 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을 창설했다. 그 뒤 도승지, 대사성 등의 벼슬을 지냈고,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해주에 수양 서원을 세우고 최충의 제사를 모셨다. 청렴한 관리로서 효성이 지극한 그는, 「입, 몸, 마음」을 삼가야 한다는 생활규범을 철저히 지켰으며, 오륜가등 사회교화를 위한 시가를 지어 선비 도를 계몽하였으며, 이는 유교적 수신의 표본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보여준 청백리는 행정면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분야에서 종사하건 그것이 민족의식을 고취 시키거나 또는 민족의 힘을 앙양시킴은 물론, 민중의 계몽이나 교학에 힘쓴 데서도 뚜렸 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 경우의 사람이 바로 주세붕이라 하겠다. 그는 학자로서 청백리로 일생을 보냈으며, 꿋꿋한 선비정신은 朝野에 신망이 대단히 두터웠던 인물이었다.. <도동곡>< 육현가> < 엄연곡> <태평곡> 등의 장가와 < 군자가> 등의 단가 8수가 전하며, 저서에 <무릉잡고>가 있다.

李 滉 (이 황)  (1501 연산군 7 ~ 1570 선조 3) 

조선 중기의 유학자. 호는 퇴계 (退溪), 퇴도(退陶), 도옹(陶翁)이고,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154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친 뒤 1568년에 우찬성, 대제학에 올랐으며, 이듬해 벼슬자리에서 물러난 뒤 고향에 도산서원을 세워 학문과 후배 양성에 힘썼다.그는 주자의 ‘이기 이원론(理氣二元論)’을 이어받아 크게 발전시킨 유학자로, 유성룡, 김성일, 정구 등으로 이어진 영남 학파를 이루었으며, 이이의 기호 학파와 함께 우리나라 유학의 2대 주류가 되었다. 중종, 명종, 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그의 학문은 일본 유학계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한국이 낳은 국제적인 대학자 이다. 그렇지만, 자만심없이 항상 공손하고 겸손하고 검소한 생활로 한평생을 살았으며, 부귀영화를 한갖 뜬 구름같이 여기고, 예법으로 몸가짐을 바로 하였다. 이황은 나이 70세로서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평상시의 청렴한 생활태도를 잃지 않고 유언으로써 자기가 죽은 후에 예절을 번거롭게 하지 말 것을 타일렀다. 형식이 아니라 실천으로서 검소하고 경건하게 한평생을 살다 간 우리의 대표적인 학자요, 거룩한 정신을 남겨준 위대한 분이었다.그
가 세상을 떠난 뒤에 영의정 벼슬을 내렸다.
저서에는 <퇴계집> < 성학십도> < 주자서절요> <자성록>등이 있고, 시조 작품으로 < 도산십이곡>이 있다.

李浚慶 (이준경)  (1499 연산군 5 ~ 1572 선조 5) 

 조선 선조 때의 영의정, 자는 原吉, 호는 東皐(동고), 시호는 忠正公으로 관은 羅州이다. 중종26년 문과 급제하여 황해도 과찰사, 병조판서, 都巡察使, 右贊成, 右議政, 領議政을 역임 하였다.
몸 가짐이 언제나 청백하였고, 검소하며, 方嚴(방엄) 하였다. 학문을 증진 하며, 기예를 닦는데도 힘썼거니와 병석에서도 언제나 朋黨(붕당)을 제거해야 한다고 上疏(상소)하였지만 謀()도 자주 받았다.
이준경은 어려운 때를 살았다. 조선왕조는 중기로 접어들면서 士禍(사화)와 당쟁이 계속되어 국력은 점점 약화 되었고, 사람들은 公보다 私에 기울어져 사회정의가 구현될 수 없었다. 계속되는 分派 작용은 對立相만을 조장시켰고, 감정만이 판을 치는 침체기에 처하였을 때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로써 언제나 백성을 염두에 두고서 정치를 펴나간 「 어진 정승」이라는 별명까지들은 인물이다.

宋太用 (송태용) (1898~1971)  
 
6.25사변으로 인하여 유물은 없어졌으며, 조그만 증명사진이 하나 남아 후손이 복원한 것이다.

  일제탄압에 저항 무명의 선비로 유명하다. 호는 一春(일춘) 일본총독부에서 행정관리를 임명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자 투옥하여 투옥생활을 2년 하다 출옥하여, 이름없는 선비로 독립의 날을 기달리다 광복의 날을 맞았으나 그때나이 50세가 되고, 평생 한학만으로 세상을 보냈다. 남의 것을 넘보지 않고, 어려움을 격는사람을 보지 못하는 성미라 여러 가지의 일화가 있다.
집에는 쌀한말 있을 때가 그의 없었으며, 집도 남의집 방을 빌려 살았다.밖에 다니다가 옷을 더럽게 입은 걸인을 보는데로 집에 데려다가 겸상을하여 식사를 자주하였으나, 부인(청주정씨)는 싫은 내색을 않고, 없는 살림에 자기는 굶으면서도 걸인을 잘대접하였느나, 집주인이 이를 더럽다고 싫어하여 여러번 이사를 자주 다녔다고 한다, 그야말로 이름없는 청백리 정신으로 일생을 마쳤다. 

沈守慶 (심수경) (1516중종11~1599선조32)  

   조선 중기의 명신이다. 자는 希安(희안), 호는 聽天堂(청천당), 문과 급제하여, 직제학, 감사, 우의정을 역임하였다. 명종때 장원급제한 후 관찰사를 역임한 뒤 청백리에 뽑혔다. 도성지 등을 거쳐 우의정까지 올랐다. 무예에도 능하였으며, 이 곧고 바르게 자기의 능력을 다한 大義(대의)로 한평생을 보낸 선비이기도 하다. 「遺閑雜錄(유한잡록)」「歸田唱酬(귀전창수)」등 많은 저서도 남겼다.

柳成龍(유성룡) (1542명종27~1607선조40)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호는 서애(西厓)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로서 156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와 이조 좌랑을 거쳐 부제학에 올랐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로 있으면서 이순신, 권율 등의 장군을 추천하여 나라를 구하는 데 힘썼다. 영의정에 올랐다가 반대파의 모함으로 영의정에서 물러나기도 하였으나, 그뒤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기르고, 무기를 만들며, 성을 쌓는 등 국방을 철저히 하였다. 문장, 글씨, 덕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저서로 < 서애집> < 징비록> < 난후잡록> 등이 있다.

李恒福 (이항복) (1556명종11~1618광해군10)

   조선 선조 때의 문신. 호는 백사(白沙), 필운(弼雲), 동강(東岡)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80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589년에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예조 정랑으로서 이를 수습하여 평난공신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선조를 의주까지 모신 공으로 오성군에 봉해지고, 병조 판서로서 국난을 잘 처리하여 영의정이 되는 한편, 1602년에는 오성 부원군에 봉해졌다. 1617년에 당파 싸움이 일어나 인목 대비를 폐하자는 폐모론이 나오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북청으로 귀양가서 일생을 마쳤다. 그는 어려서부터 슬기롭고 재치 있는 장난을 즐겼다 하며, 한음 이덕형과는 각별히 친하여 그들 사이의 많은 일화가 전한다. 주요 저서로 < 백사집> <주소계의> <사례훈몽> 등이 있다.

李元翼 (이원익) (1547명종2~1634인조12)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오리(梧里)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6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 호조·예조·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고, 여러 차례 영의정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는 도순찰사로 큰 공을 세웠으며,뒤에 호성 공신으로 완평 부원군에 봉해졌다. 1608년에 이이가 이루지 못한 대동법을 실시하여 불합리한 세금 제도를 고치는 등 한평생 국민의 살림 걱정을 하였으나, 그 자신은 가난하여 비가 오면 지붕이 새고 병이 들어도 약을 지어 먹을 돈이 없었다 한다. 청렴한 관리로 이름이 높아 많은 일화를 남겼으며, 특히 문장에 뛰어났다. 저서로 <오리집> <속오리집> <오리일기> 등이 있다.

金長生 (김장생) (1548명종3~1631인조9)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 호는 사계(沙溪)이고,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송익필에게 예학을 배우고, 이이(李珥)에게 성리학을 배워 조선 예학의 거목으로서 이름이 높다. 송시열, 송준길 등 이름난 유학자들이 그에게서 배웠다. 여러 차례 벼슬길에 올랐으나, 성품이 곧아 한 자리에 오래 있지 못하였다. 저서로는 <경서변의> <서소잡록> <가례집람> 등이 있다.

金 集 (김 집) (1547선조7~1656효종7)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호는 신독재(愼獨齋)이고,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1610년( 광해군 2년)에 재랑이 되었으나 광해군의 문란한 정치를 보고 관직을 사퇴하여 아버지 장생(長生)을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인조 반정 후 다시 등용되어 공조의 참의 등을 지내고, 효종이 즉위한 뒤 이조 판서가 되어 효종과 함께 북벌을 계획하였다. 이 때 실각한 김자점이 이 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하여 사태가 시끄럽게 되었으므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만년에는 예학을 대성하여, 그의 아버지와 더불어 예학의 기본적 체계를 완성시켰다. 저서에 <신독재유고>가 있다.

金尙憲 (김상헌) (1570선조3~1652효종3)

  조선 인조 때의 학자. 호는 청음(淸陰)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1596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교리·직제학 등을 지냈으나, 광해군의 뜻을 거슬려 벼슬에서 쫓겨났다. 인조 반정으로 다시 등용되었으나, 병자호란 때 이조 판서로서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하다가 굴욕적인 화의가 성립되자 벼슬을 잃었다. 1639년에는 청나라에서 명나라를 치기 위해 군사를 요구하는 데 반대 상소를 올려, 이듬해 선양(--陽)으로 잡혀갔다. 그 곳에서 3년 동안에 걸쳐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절개를 지키자, 청나라 왕은 감탄하여 돌려보냈다. 귀국한 후 좌의정 등의 벼슬을 지냈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충의를 노래한 시조 2수가 남아 있다.

崔有慶 (최유경) (1343충혜왕복위4~1413태종13)

  고려 말에서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이다. 자는 경지이며, 호는 죽정이다. 시호는 평도이다. 최유경의 할아버지는 선부전서 상호군을 지낸 최득평이며, 아버지는 감찰대부를 지낸 최재이고, 어머니는 무안군부인 박씨로 군부정랑을 지낸 박윤류의 딸이다. 최유경은 1372년( 공민왕 21) 판도좌랑으로 있으면서, 각 도의 의염의 소금가마가 세력을 지닌 지방의 호족들에게 새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이를 염창에 속하게 하였다. 그 뒤 사헌부 장령을 지냈는데, 환관 윤충좌가 왕의 총애를 믿고 교만 방자하게 불법을 저지르자 그를 탄핵하였다. 1375년( 우왕 1)에 전법사총랑이 되었으며, 1388년( 우왕14)에는 양광도안렴사가 되었는데, 이 때 토지와 노비가 문란해지자 이를 정비하기 위한 임시 관아로서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는 데 대하여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그 해 이성계가 요동을 정벌하기 위하여 출동하였다가,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렸다. 이 때 최유경은 이성계가 반역한 사실을 재빨리 우왕에게 알렸다. 그러나 최영이 실각한 후 창왕이 고려의 제33대 임금의 자리에 오른 뒤에도 밀직부사가 되었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하면서 이성계가 태조가 되었다. 조선의 건국에 공을 세운 개국 공신과 그 외에 작은 공이 있는 원종 공신의 공로를 문서에 적으려 할 때, 최유경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당시 임금인 우왕에게 고발하였으므로 공신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었다. 그러나 태조는 최유경의 충성스러운 마음을 높이 사 그에게 개국원종 공신이라는 훈장을 내렸다. 그 뒤 최유경은 1395년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고, 1397년에 중추원 부지사로서 경기도· 충청도 도체찰사가 되어 여러 지방을 돌아다녔다. 1398년에는 개성유후사유후를 지내고, 태조가 그를 크게 신임함으로써 여러 차례 왕의 특사로서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1401년( 태종 1) 사헌부의 우두머리 벼슬로 종2품인 대사언이 되었으며, 같은 해에 참찬의정부사로서 명나라에 정월 초하룻날 새해를 축하하러 가는 사신이 되어 다녀왔다. 1404년에 한성부판사에 이르러 늙었다고 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최유경은 태종 때, 의정부· 육조·경조의 2품 이상의 당상관과 사헌부· 사간원의 벼슬아치들이 청렴한 벼슬아치라고 추천하여 뽑는 청백리가 되었다. 청주에 있는 송천 서원에 위패가 모셔졌다.

尹思翼 (윤사익) ( ? ~1563명종18)

  조선중기의 문신이다. 지평, 헌납, 장령, 병조참의, 천추사, 한성부우윤,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그는 원래 성품이 결직하고, 번걸롭지 않아서 벼슬길에 나아갈 때엔 반드시 조심하여 백성을 다스렸다. 중종 33년에 청백리로 뽑힌 그는 청백한 몸가짐으로 6년 뒤엔 한성부판윤으로 승진하였다. 그는 능력이 미치지 못함을 이유로 사양하였으나, 왕은 「근래에 염치의 도가 상실 되어 있는데, 경의 청덕을 들은지 오래다.이로서 다른 사람을 勸戒(권계) 하기 위하여 특별히 加資(가자)한 것이니, 사양하지 말라」 고 하여 그의 청백함을 높이 기렸다.

李 原 (이 원) (1368공민왕17~1429세종11)

  세종 때의 명신이다. 자는 차산, 호는 용헌, 시호는 양헌공 이다. 고려때 문과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병부정랑을 지내고, 조선 건국후 臺閣(대각)에서 일하고,좌부승지, 좌명공신, 대사헌, 경기관찰사, 유명시, 이조판서, 병조판서, 영정부참찬, 참성사,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정치에 참여하여 묘당출입이 20년이나 되었다. 정사는 관대하게 처리 되었으나, 모함으로 여산에 귀양가서 병사하였다. 손자인 李則(이칙) 李陸(이육) 그리고 증손인 李胃(이위)가 벼슬길에서 활약하였다.

黃孝源 (황효원) (1414태종14~1481성종12)

  조선 세조때 문관이다. 자는 子永, 시호는 襄平公이다. 세종때 문과 급제후 우참찬, 순성좌리공신, 상산군에 책봉되고, 관찰사로 역임 하였다.

鄭文炯 (정문형) (1426세종8~1501연산군11)

  조선 연산군때 명신이다. 자는 明叔, 호는 野수, 시호는 良敬公이다. 세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七朝에 역임하여 북병사,영의정을 역임하였으며, 재직 50년간 청렴결백하여 도에 벗어난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趙彦秀 (조언수) (1479연산군3~1574선조7)

  조선 선조때 명신이다. 자는 伯高, 호는 貞簡公이다. 문과에 급제후 예문관을 거쳐 이조정랑, 도승지, 성절사, 예조참판, 함경.강원도按廉使, 한성우윤, 세자빈객, 한성판윤,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관리 40년이나 재산을 물려 받은 집 뿐이다.

李 塤 (이 훈) (1429세종11~1481성종12)

  조선 세조때 공신이다. 初名은 墅, 자는 和伯, 賭翁. 시호는 安昭公이다. 효령대군의 사위. 판제용군자감사. 한성부윤, 형조참의, 이시애란 진압참가, 경기관찰사, 한성판윤, 총리좌리공신, 한성군 책봉, 5위도총부도총관, 좌참찬을 역임하였다.

曺致虞 (조치우) (   ?     )

  조선 중종때 문신이다. 자는 舜卿, 문과 급제후 한림,司饔院正, 대구부사를 역임 하였다. 청백리이며, 玉碑를 내려 청덕을 表旌햇다. 효성이 지극했으며 관직도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사임. 효자정문이 세워졌으며, 효행으로 일찍이 소학을 하사 받았다.

金 詮 (김 전) (1458세조4~1523중종18)

  조선 중종때 재상. 자는 仲倫, 호는 懶軒, 시호는 忠貞公이다. 성종때 장원급제후 예안현감, 대사헌, 우의정, 영의정을 역임 하였다. 예안현감 때의 선정을 베풀어서 지방민중들은 生祀堂까지 지어서 기념 하였다.

申公濟 (신공제) (1469예종1~1538중종31)

  조선 중종때 문관이다. 자는 仁希, 호는 伊溪이다. 연산군때 문과급제, 이조판서를 역임 하였다. 성품이 강직하며, 시종일관하여 대의명분을 따랐으므로 權臣들의 미움을 받아 여러번 죽을 번을 하였고, 草隸書를 잘 썼던 청백리였다.

金延壽 (김연수) (    ?    )

  조선 중종때 관원, 청풍군수등을 역임하였다. 청풍지방에는 나무로 만든 木偶人을 신이라 하여 매년 5~6월 사이에 객사에 모시고 제사하여 폐단이 컸는데 김연수가 부임하여 남녀좌당을 잡아 가두고 목우인도 불살라서 민폐를 완전히 제거 하였다.

李安訥 (이안눌) (1571선조4~1637인조15)

  조선 중종때의 문신이다. 자는 子敏, 호는 東岳, 시호는 文惠公이다. 예조이조정랑, 서장관, 동래부사, 단양부윤, 승문원부제조, 동부승지, 예조참의, 강화부윤을 지냈다. 인조반정후 예조참판, 형조참판, 함경도관찰사, 예조판서, 예문관제학, 충청도관찰사를 지냈고,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에 扈從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0천의 향사와 단양의 구산서원에 제향되었다.

李時白 (이시백) (1592선조25~1660현종1)

  조선시대 문신이다. 자는 敦詩, 호는 釣巖, 시호는 忠翼公이다. 본관을 연안, 이항복, 김장생의 문인이다. 그는 한낱 유생으로 인조반정에 참여 靖社功臣2등으로 延陽君이 되었다. 수원방어사, 강화부류수를 지냈고, 병조참판으로 남한산성수어사, 호위대장, 특진관을 겸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서성장으로 성을 수비했다.그 후 斥和를 주장하고, 병조판서, 공조판서를 역임 하였고, 여러 차례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 오기도 하였고, 3정승을 고루 맡아보며 나라에 충성을 하였다. 그의 치적중에서 두드러진 것 중의 하나는 金堉의 건의를 받아들여 호남에도 대동법을 실시 하여 (1658)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준 일이다.

李直彦 (이직언) (1545인종1~1628인조6)

  조선중기의 문신이다. 초명은 時彦, 자는 君美, 호는 秋泉, 시호는 貞簡公, 효령대군의 5대손이다. 임진왜란때 명나라에 군량미의 원조를 요청, 경상도賑恤어사, 해주목사, 여주목사, 경주부윤,경기도관찰사, 한성부판윤,인조반장후 우찬성을 역임 하였다. 50여년의 관직생활을 통하여 그는 언제나 바른말을 서슴치 않았으며, 사무를 옳고 바르게 보는 눈을 가지고 언행을 엄격히 하였다. 한편 오랫동안 지방관을 지내면서는 오로지 백성들의 생활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그들을 친자식 같이 돌보며, 그들의 어려움을 벗겨주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許 항 (허 항) (1548명종3~1618광해군10)

  조선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公愼, 호는 負暄, 시호는 貞穆公이며, 許琮의 4대손이다. 공주목사, 충청도관찰사, 강계부사, 의주부윤, 평안도관찰사, 병조참판, 한성부판윤, 호조판서, 이조판서, 좌의정, 우의정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때 청량사로 명나라에 가서 栗22,700섬을 얻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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