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사임당과 그 예술

지난날 우리나라 역사상의 주인공은 남성들이었다.남성을 주축으로 하는 모든 윤리적 질서는 이 땅의 여성들로 하여금 부정이라는 낱말을 망각시켰다.

이러한 부정없는 드라마 속에서도 일련의 여류예술인들은 그들의 아름다운 꿈을 화폭 위에 수놓았다.
우리나라에서 글씨 잘 쓰던 여성으로는 李齊賢
(이제현)의 손녀 李씨와 姜希顔(강희안)의 딸 姜씨와 張興孝(정흥효)의 딸 張씨 같은 이들을 꼽을 수 있겠고,

여류 화가로는 鄭慶欽
(정경흠)의 누이 鄭씨와 그밖에 몇몇 기생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여성들은 모두 한 두 가지에만 능하여 이름을 떨쳤을 뿐이다.

아마 종합적인 전 여성으로서 정숙한 덕과 아름다운 행실, 그 위에 시와 그림과 글씨에까지 통하여 신묘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신사임당 한 사람뿐일 것이다.

그러기에 영조 때 洪良漢(홍양한)이 지은 (사임당 申씨의 그림 폭에 적는다.)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글이 보인다.

「그림으로써 세상에 들어간 이가 이루 헤아릴 수 없지마는 모두 남자요, 부인은 아주 없으며, 또 잘 그리는 이는 많아도 신묘(神妙)한 경지에 들어간 이는 드문데, 부인으로서 그림을 잘 그려 신묘한데 들어간 이야말로 오직 우리나라 사임당 申씨가 그분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임당의 그림이 세상에서 진귀하게 여김을 받는 것이 저 값진 구슬과 같을 뿐만이 아닌 것이다.」라고 했다.

사임당의 그림들에 붙어 있는 옛 사람들의 방문들을 보면, 위에 말한 홍양한 이외 肅宗大王(숙종대왕)과 宋時烈(송시열)을 비롯하여 홍양호, 소세양, 권상하, 신경, 김진규, 신정하, 송상기, 이병연, 신석우, 신응조, 이언유, 송근수, 이어서, 오세창등 많은 학자들이 쓰고 있는데,

이들 모두 사임당의 그림을 격찬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실로 사임당은 현모양처로서의 자격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학문과 시와 문장에 있어서도 능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실상은 글씨와 그림에 더욱더 우월한 솜씨를 나타낸 여류예술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임당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에 학문은 물론이거니와 그림과 글씨도 한문글씨의 바른 체법(體法)에 맞는 글씨이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사임당은 어려서부터 붓과 벼루를 들고 살았기 때문에 부인의 글씨는 많이 써서 넘겼겠지만, 지금 전하는 것으로는 초서
(草書) 여섯 폭과 해서(楷書) 한 폭이 남아 있을 뿐이니 참으로 유감스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비록 몇 조각 남은 것일망정 거기서 우리는 사임당의 고상한 정신과 기백이 들어 있음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다행한 일이다. 이중 초서여섯 폭은 병풍으로 만들어져 지금 강릉 오죽헌 바로 옆에 있는 율곡기념관에 간직하고 있고 해서 한 폭은 서울특별시 돈암동 이병철이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초서 여섯 폭짜리 병풍에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게 된 데에는 예술의 세계를 알고 문화재를 아낄 줄 아는 사람들의 노고와 갸륵한 마음씨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사임당의 그림 역시도 일찍부터 많은 학자들의 절찬을 받아 왔다. 사임당은 7세때 산수화,포도화(葡萄畵)를 그렸고, 그 외 오히려 절묘한 솜씨를 보인 것은 "포도"와 벌, 잠자리, 나비, 등의 "풀벌레"였으며 다시 그 위에 서예도 능숙했다.

특히 사임당의 초충도와 포도 그림은 당대의 화단에서 독보적인 경지를 누렸다. 사임당의 그림을 종류별로 보면 풀벌레
(草蟲), 포도, 꽃과 풀과 고기와 대나무(花草魚竹), 매화, 난초, 산수등 주로 자연을 그린 그림이 많다.
그중에서 현재 실물로 남아 전하는 것은 풀벌레, 화초어죽, 매화 등이다. 아래 옛 명인들의 사임당의 그림에 대한 예찬사를 소개하면,

율곡이 지은 師任堂行狀(사임당 행장)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포도를 얼마나 잘 그리 셧던지 세상에는 비길 만한 사람이 없었다.」하였고,

명종때 魚叔權(어숙권)은 그의 稗宮雜記(패궁잡기)에서

「사임당은 어려서부터 그림을 공부했는데 그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安堅(안견)에 다음 간다고 한다.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경솔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냐.하였고 또

李秉淵(이병연)은 "사임당 포도에 붙이는 詩"에서

「아버지 교훈 아래 자라난 부인, 우리 동방 어진 인물 낳으셨으니, 사람들은 포도그림만 좋아 하면서, 부녀 중의 李營丘(이영구)(宋나라 화가)라 일컫는구나.」하였고, 또

숙종 39년(1713)에 宋相琦(송상기)(玉吾齊大提學)는 사임당의 그림에 대해 말하기를

「내게 일가 한 분이 있어 일찍 말하되 집에 율곡선생 어머님이 그린 풀벌레 그림 한 폭이 있는데, 여름철이 되어 마당 가운데로 내어다 볕을 쬐자니 닭이 와서 쪼아 종이가 뚫어졌다.」는 것이다.

볕에 쬐어 말려 두려고 내놓았던 사임당의 그림이 아마 닭에 눈에도 그 그림 속의 풀벌레가 정말 살아있는 것 같아 단숨에 쪼아 먹었던 모양이다. 또 그는 말하기를

「옛 부 터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야 어찌 한정이 있으랴마는 다만 그 사람 자신이 후세에 전할 만한 인품을 가진 연후에야 그 그림이 더욱 귀한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그야말로 그림은 그림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인 것이다. 어찌 족히 중경(重輕)을 말할 것이 있다 하랴.
사임당의 정숙한 덕과 아름다운 행실은 지금껏 이야기하는 이들이 부녀 중의 으뜸이라고 일컫기도 하거니와 더구나 율곡선생으로써 아들을 삼은 것이라. 선생은 백세
(百世)의 사표(師表)인 만큼 세상이 어찌 그분을 앙모 하면서 그 스승의 어버이를 공경하지 않을까 보냐. 그러므로 사임당이 뒷 세상에 전해진 까닭은 본시부터도 그럴 수 있는 것인데 그 위에 또 이 그림 첩이 있어 그것을 도운 것이다.....」하였다.

조선시대의 여성으로서 덕 행을 쌓은 여가에 예술까지 이처럼 능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감사합니다.>

      신사임당으로 이동